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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정나루터와간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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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통로 "낙정나루터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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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의 서쪽 끝 단밀면. 낙정마을은 너른 낙동강을 향해 곶처럼 자리한다. 강의 저편은 상주의 낙동면 낙동리다.1986년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이 강에는 나루가 있었다.
낙정 나루다.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던 시절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80년대 중반까지 큰 거룻배는 넷 혹은 다섯의 장정이 묵직한 노를 저었고 버스와 마차, 경운기와 자전거 따위를 가득 싣고 강을 오갔다. 나루 앞에는 밥집과 술집이 쭉 늘어서 있었고 색시집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 오래지도 않은데 너무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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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정마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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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정마을은 1400년대 초 윤관(尹管)이란 사람이 개척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낙정마을은 그보다 더 오래전 ‘고려사’에 낙동역(洛東驛)으로 등장한다. 근 천 년에 이르는 역마을인 것이다. 낙정은 원래 낙동강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낙동이라 했는데, 약 200년 전 마을에 좋은 우물이 생겨나면서 ‘낙정(洛井)’이 되었다.
조선시대 영남 각 지역의 세곡과 사람은 모두 낙정마을을 거쳐갔다. 배로 실어온 낙동강 하류의 물자는 여기서 수레로 옮겨져 문경새재를 넘었다. 마을에는 주막과 숙소가 가득했고, 강변에는 역마와 수레가 빼곡했다. 물길 가까이에는 소금 창고도 있었다. 소금 실은 배가 올라오면 마을 사람들은 지게에 곡식을 지고 가 소금과 맞바꿨다.낙동강 물길을 1300리라고 한다. 하지만 한때 낙동강 700리라고도 했다.
이는 구포에서부터 이곳까지를 의미했다. 낙정나루는 1300리 낙동강 물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나루였다. 나루는 다리의 건설로 옛 터만 남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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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단교 바로 옆에는 수십m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이 솟아올라 수백m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 위에 잘 생긴 누각 관수루(觀水樓)가 낙동강의 유장한 흐름을 굽어보며 앉아 있다.
관수루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으로 낙동강변의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힌다.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은 물론 의성, 상주, 구미 세 고을의 주름진 산과 드넓은 들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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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루는 고려 중엽에 세워졌다 한다. 누각 안에는 이황, 주세붕, 김종직, 김일손 등 조선의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낙동강을 노래한 시 열 편이 걸려 있다. 관수루. 물을 보는 정자. 이곳에서 김종직은 물 대신 사람들을 보았다. 그가 보았던 모습은 그가 죽고, 연산군에 의해 다시 한 번 죽은 후에도 오래 반복되었을 것이다. 관수루는 긴 시간 동안 긴 길 걸어 나루에 도착한 고단하고 가난한 이들을 품어주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후 관수루는 전쟁으로 핏물이 되어 흐르는 강도 보았을 것이다. 줄 잇던 행인이 끊어지고, 다리가 놓이고, 나루터가 없어지고,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것도 관수루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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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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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484m 길이의 낙단교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다리가 놓이는 데는 무려 14년이 걸렸다. ‘14년간의 가슴 앓이’라 해도 좋다. 선거 때만 되면 ‘다리를 반드시 완공 하겠다’는 공약이 쏟아졌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또 그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리는 1986년 8월 완공되었다.
최초로 공약한 지 14년 만에, 교각 6개만 덩그러니 세운 지 11년 만이었다. 다리는 낙동면과 단밀면의 이름을 합해 ‘낙단교’라 이름 지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선거다리’라 불렀다.
관수루는 김종직의 시처럼 여전히 넉넉함으로 객을 맞이 하고 보낸다. 낙단교는 낙단대교가 건설되면서 오가는 차량이 그리 많지 않지만, 여유로운 풍경과 옛 나루터의 기억을 소환하는 데는 유용하다. 강은 그 긴 시간과 그 많은 기억에도 여전히 ‘한 점 꿰맨 자국’ 없이 거대하게 말갛다.
아니 어쩌면 저기에 보이는 저 낙단보가 꿰맨 한 점 자국일지도 모르겠다.
제작 : 의성군, 영남일보 공동기획 스토리텔링 PDF 다운로드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