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열기

조문국

조문국01

아스라한 그 이름 “조문국(召文國)”

조문국 이미지1
조문국. 아스라한 이름이다. 많은 기록은 없다.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읍지(邑誌) 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에 조문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벌휴이사금이 조문국을 정벌하였다’는 내용이 짧지만 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문국은 삼한시대 의성지역에 번성했던 국가였고 벌휴이사금 때인 185년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문국02

조문국의 고분

조문국 이미지2
봉분들은 침착하고 고요하게 솟아 있다. 대부분 원형의 봉토분이다. 봉토를 이루고 있는 저 엄청난 양의 흙은 이 지역의 흙색과는 다른 순수한 점토라 한다. 다른 지역에서 운반해 왔으리라 판단되는데, 그에 따르는 막대한 노동력은 통치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영속화된 권력이, 영구한 힘이, 봉분으로 쌓여 있다.
고분의 발굴조사는 1960년부터였다. 그리고 금동관, 금동 관장식품, 금동제귀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철제 무기류,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초기 국가 형성기의 대표적인 정치 집단이 이 땅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조문국은 지금, ‘잃어버린 대왕국’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어떤 기록들보다도 먼저 금성(金城)이라는 땅의 이름이 오랜 정체를 소리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문국03

경덕왕릉

조문국 이미지3
경덕왕릉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는 지방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온 이야기다. 지금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이 밭이었다 한다. 어느 날 밭을 지키던 농부의 꿈에 금관을 쓴 백발의 노인이 나타난다. ‘나는 신라시대 조문국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고 명하고는 농부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농부는 등의 글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놀라 현령에게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선 숙종 시대 학자 미수 허목의 문집에 기록으로 전해진다. 한 농부가 오이 밭을 갈다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다.
구멍으로 들어가자 금칠을 한 석실 한가운데에서 금관을 쓴 금소상(金塑像)을 보게 된다. 욕심이 난 농부가 금관을 벗기려 하자 손이 금관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의성 군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경덕왕이다.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고 말했고 이후 봉분을 쌓고 관리 하였다는 이야기다. 영조 원년인 1725년에는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고 그때부터 왕릉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며 쓴 미수 허목 선생의 시가 있다.
조문국04

조문국박물관

조문국 이미지4
경덕왕릉 앞에는 봉분 모양의 ‘고분 전시관’이 자리한다.
자연스러운 곡선의 봉분들 속에서 기하학적인 반구 모양의 전시관은 불시착한 행성 같다. 내부에는 2009년 발굴한 대리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이 재현되어 있고, 유구와 출토 유물, 순장문화를 통해 당시의 매장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조문국05

고분전시관

조문국 이미지4
고분군에서 멀지 않은 금성면 초전리에는 ‘의성조문국 박물관’이 있다. 옛 조문초등 자리에 2013년에 지은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건물이다. 전시실에는 그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문국 관련 유물과 의성지역에서 출토되었던 유물들이 모여 있다. 박물관은 특히 어린이가 있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에게 만족도가 높다. 옥상은 또 하나의 전망대다. 금성산이 제 이름 그대로 철의 성벽처럼 솟아 있고 그 아래에 또렷이 펼쳐진 고분군이 한눈에 조망된다. 산과 옛 무덤들이 서로의 정적과 평화를 경건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작 : 의성군, 영남일보 공동기획 스토리텔링 PDF 다운로드 다운로드